누비는 악양 옛 도시의 서문 위에, 물 위에 서 있다. 앞에는 동정호가 펼쳐지고, 맞은편에는 군산도가 떠 있고, 조금 북쪽에서는 양자강이 도시에 기댄다. 난징(江南, 양자강 남쪽)의 세 대명루 가운데 하나로, 정등루(滕王閣)와 황후루(黃鶴樓)와 함께 오른다. 오늘 관람객이 보는 것은 순목(純木) 구조물이다. 세 겹의 처마, 높이 19.42미터, 바닥부터 지붕까지 이어지는 난무(楠木) 기둥 네 개가 받치고, 전체가 철못 하나 없이 조립됐다. 노란 유리기와를 덮은 지붕은 옛 장군의 투구처럼 가파르게 솟아 올랐고, 이 투구 모양 지붕은 중국에 남아 있는 고건물 가운데 가장 크다. 이 자리를 3세대로 연결하는 지역의 전설이 있다. 동오(東吳, 천하를 다투던 삼국 가운데 하나)의 높은 벼슬인 장군 루수(魯肅)가 215년 무렵, 오(吳)와 맞세우던 중강(中江) 유역에서 수군을 살피는 누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 장군의 지휘소가 정확히 이 자리에 있었는지와는 상관없이, 성벽 위에 누비가 있었다는 기록은 1,700년 동안 이어진다. 파괴되고 다시 지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당(618–907)나라 이전에는 군사 용도로 쓰였고, 당나라 이후에는 시인이 시를 읽고 부를호를 지을 풍경지가 되었다.
저널에서
천 년 동안 계속 쓰여온 누비
악양루는 옛 성벽 위의 목조 건물이지만, 진짜 기념물은 1046년 이 누비를 위해 쓰인 360자짜리 글이다. 건물과 그 글, 그리고 이 누비가 겪고 넘어온 화재와 재건의 기록을 담는다.
같은 도시에서 · 악양시 ↗누비란 무엇인가
이 누비를 유명하게 만든 글
한 편의 글이 남게 된 까닭은 같은 해에 두 관리의 인도가 함께 기울었기 때문이다. 1044년 등즈징(滕子京)이 예주(岳州) 지사로 밀려났다. 그는 1045년과 1046년에 걸쳐 흩어진 누비를 수리한 뒤, 북송(960–1279)의 저명 정치가이자 벗 판중연(范仲淹)에게 비문(碑文)을 써 달라고 편지를 쓰며, 호수 위로 떨어지는 가을 해질녘의 누비 그림을 함께 보냈다. 판중연은 그때 막 수도를 지키던 참지정사(參知政事)의 자리에서 밀려나 허난성 덩주(鄧州) 태수로 내려가 있었다. 함께 자리를 잃은 벗들이 서로를 위로하던 때였다. 그의 답신은 1046년 음력 9월 15일 날짜로, 길이 360자 조금을 넘지 않았다. 그 글은 호수를 서로 반대되는 두 날씨에 놓는다. 비와 어둠, 고요와 밝음이다. 그리고 글의 중심에는 책임지는 사람의 몫이 놓인다. 세상이 걱정하기 전에 걱정하고, 세상이 기뻐한 뒤에 기뻐하는 것이다. 그 글이 누비를 만들었고, 서예가들은 다시 그 글을 한 물건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판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1740년대 청(1644–1912)나라 형부상서(刑部尚書) 장자오(張照)가 쓴 글씨다. 어떤 지방관이 청을 청해 자단목 판재 열두 장에 새겨 넣었고, 오늘날 그 글은 누비 이층의 홀에 덧대어 놓여 있다. 건물을 유명하게 만든 그 글자가, 그 건물을 유명하게 만든 자리 안에서 읽히는 셈이다.
불타던 누비
누비가 천 년을 버틴 것은 운과 돈의 문제였다. 1688년 완전히 타 버렸다. 1701년에 발주한 새 누비는 완공되기도 전에 홍수로 무너졌고, 수십 년 동안 성벽에는 누비가 아예 없었다. 1740년대에 이르러 6천냥(兩)의 수리 은으로 높이 5장(丈)의 난무(楠木) 석축(石築) 삼층 누비가 지어졌다. 위대한 재건은 1880년에 왔다. 관인 장더룽(張德容)이 물에 잠식되는 둑에서 구조물 전체를 6장 넘게 뒤로 옮기고, 지붕 기와를 통유(桐油)와 석회로 붙들며, 돌 회벽과 성벽을 찹쌀가루와 정밀 도자재 그을음을 반죽한 진흙처럼 굳혀 칼이 물지 않게 했다. 다시 썩음과 전쟁이 그 많은 것을 무너뜨렸다. 청(1644–1912)나라 말기에 이르면 누비는 기울어진 벽과 빈 창살만 남았고, 초기 공화국의 실밥 이음매처럼 뜯어 고친 수리는 전쟁을 따라가지 못했다. 1932년 복구는 지붕 기와를 다시 얹고, 썩은 목재를 갈아 붙이고, 세 면을 벽돌로 다시 쌓으면서 옛 배치를 안에 남겼다. 1949년 이후에는 긴 복원이 이어졌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누비를 해체했다가 다시 세웠는데, 원칙은 '오래된 것은 오래된 대로'였고, 원래 부재의 절반 이상을 그대로 보존했다. 오늘 이 누비는 난징 세 대명루 가운데 원래 모습 그대로 남은 유일한 누비로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