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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농부의 무덤

연제의 무덤은 농사와 한약의 발명을 공로로 알려진 전설의 제왕을 모시는 자리다. 황제들은 관사를 보내 제사를 드렸고, 참객들은 청명절과 음력 7월에도 그곳으로 돌아온다.

같은 도시에서 · 항양 ↗

묘와 그 자리

연제의 무덤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제기되는 주장이다. 자료들도 그의 실제 묻힌 곳을 확인할 수 없다고 신중하게 말한다. 송(960–1279년)나라 이래 국가가 인정한 연제릉은 후난 동부의 연릉현(炎陵縣)에 있고, 전통에 따르면 한(전한과 후한을 아우르는 왕조)나라 때부터 제사가 드려졌다. 묘 앞의 사당은 송나라 초 태조(太祖)의 건덕(乾德)년에 세워졌고, 자료에는 이 자리를 무덤으로 정한 나라가 묘 앞에 사당을 세우고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를 올렸다고 적혀 있다. 이 자리는 국가중점문화재이며, 현대의 지도자들도 여기에 비문을 남겼고, 국영우체국도 이를 기념하는 우표를 냈다. 이 자리는 사당과 묘단을 하나로 모은 자리이고, 그 주위에는 오래된 글이 인용된다. 서진(西晉)의 황푸미(皇甫謐)는 제왕이 죽어 장사로 묻힌 곳이 창사 지역이라고 기록했고, 뒤의 학자 나비(羅泌)는 그 묻힌 곳을 창사의 다(茶) 꼬리에 놓았다고 했다.

작은 정자 아래 풀 덮인 묘곽 앞의 글씨가 새겨진 석비
연제의 이름이 새겨진 석비가 그를 맞아 주는 정자 아래 묘곽 앞에 서 있다.

누가 언제 오는가

연제에 대한 숭배는 오래된 국가 의식이다. 송나라 이후 중앙정부가 연릉의 연제릉을 인정된 무덤으로 확정하고, 이를 역대 회요(宋會要)와 명회요(明會要), 청대의 법전에 적어 넣었으며, 나라를 대신해 제사를 드릴 관사를 보냈다. 그 관행은 여러 세기에 걸쳐 자료에 남아 있다. 민간의 참례는 그 국가 의식과 나란히 흐른다. 음력 7월 7일과 청명절에는 사람들이 연제릉에 모여 큰 공개 의식을 열고, 참객은 고향에서도 해외 중국계 공동체에서도 조의를 표한다. 그 중심에는 조상(祖上)이 있다. 한족은 오래전부터 자기를 연제(炎帝)와 황제(黃帝), 곧 연제와 황제의 자손이라고 말해 왔고, 두 분은 한때 중국 인민의 창시자로 함께 세어진다. 그래서 이 참례는 조상숭배이며, 두 창시자 가운데 하나로 돌아가는 일이다. 연제에게 바치는 제사는 오래된 의식으로, 선왕의 국가 의식에 기록되어 있고 예기(禮記)에도 정해져 있으며, 그는 여름 제사의 신으로 쓰인다.

그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연제는 무엇보다 여러 재능을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농사를 발명하고, 연자(犁)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오곡을 심고 맛보게 가르쳤으며, 백약을 하루씩 맛보아 각약의 성분을 알아냈고, 그래서 농업의 신이면서 의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또한 화신이자 화로의 신으로, 사람들에게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기억된다. 성은 강(姜), 이름은 신농(神農)이며, 그의 자손 가운데 화신 주융이 있다고도 한다. 자료에는 2004년에 열린 학술 회의가 연제와 신농은 같은 사람이라는 합의를 이룬다고 적혀 있다. 연제릉은 이 인물 주위에서 자기 일을 한다. 전설의 발명자를 만져 잡을 수 있는 조상으로 바꾸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돌아오는 묘단으로 바꾸며, 그 자리가 계속 이야기하는 농사와 의학의 이야기를 세워 둔다. 그의 막내딸로 여와(女媧)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가 정위(精衞)가 되어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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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및 저작권
  1. 연제의 이름이 새겨진 석비가 그를 맞아 주는 정자 아래 묘곽 앞에 서 있다.N509FZ / CC BY-SA 4.0 · CC BY-SA 4.0 원본 사진 출처 ↗ 권리 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