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누각은 오를 수 있게 지어졌다. 명나라 초, 14세기에 처음 올라왔고, 창사의 옛 성 안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섰다. 여러 층에서 감시자는 도시의 윤곽을 읽을 수 있었다. 강으로 내려가는 거리, 사방의 초소, 그 너머의 샹강까지. 성벽은 탑보다 오래됐다. 도시의 전신인 한나라 때 린샹은 기원전 202년에 이미 성을 쌓았고, 명나라 홍무 때에는 지휘관 추광이 원나라의 흙 성벽을 석축 위에 벽돌로 다시 쌓았다. 남아 있는 구간이 바로 그 부분이다. 남았지만 짧고 뚜렷하다. 길이 226미터, 높이 13.4미터, 위쪽 폭 6.1미터. 1746년 남쪽 성의 유명한 서원인 성남서원이 누각 아래 성벽 곁으로 옮겨 오면서 이 탑과 도시의 학문 지구를 묶었다. 1852년 태평천국의 포위 뒤 성벽은 다시 두껍게 쌓였고, 포대 아홉 개와 안쪽 보루를 갖게 됐다. 왕조의 마지막 몇 백 년 동안 이 탑은 지어질 때의 임무를 그대로 수행했다. 방어된 마을을 지키며 살피는 일.
저널에서
성벽을 지켜낸 탑
천심각은 창사의 옛 성벽이 남아 있는 유일한 구간의 문루다. 성벽과, 그것을 해체한 혁명과, 오늘 서 있는 이 탑은 옛 성곽이 거친 세 단계다.
같은 도시에서 · 창사 ↗성벽 위의 문루
성벽이 무너진 해
혁명은 탑 안에서 모였다. 1911년 광저우 봉기 몇 달 전, 그리고 그해 가을 후난의 봉기 직전, 음모꾼들이 천심각 안에서 비밀히 만나 전복을 모의했다. 그중에는 장교 리우웬진과 천즈신이 있었다. 결의는 1911년 10월 22일, 우창 봉기에서 며칠 뒤에 왔다. 신군 병사와 결연한 비밀결사원들이 창사를 점령했고 후난 군정이 선포됐다. 후난은 진나라를 벗어난 허베이를 뒤따른 첫 몇 개 성 가운데 하나였다. 성벽의 쓸모는 그것이 지켜 준 왕조를 오래 못 버텼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커지는 현대 도시를 두루 돌리는 환상 도로가 들어서자 성벽은 구간별로 철거됐다. 천심각 아래 구간만 남았다. 사실상 그 위의 탑이 살려 준 셈이다. 옛 선 안쪽 동네는 형태를 지켰고 도시는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누각은 창사가 한때 성벽으로 둘러싸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됐다. 주둔병의 높은 자리에서 감시하던 것이 한 세대 안에 공원의 발코니로 바뀌었다.
도시 모서리의 누각
오늘의 이 탑은 보이는 것보다 젊다는 걸 안다. 1924년에 개축되어 작은 공원의 중심이 됐지만, 1938년 11월 도시 나머지와 함께 불탔다. 문석대화,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수비군이 스스로 불붙인 창사의 소실, 에서 이 누각이 신호 지점으로 지정된 까닭은 정확히 옛 도시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문 밖의 병원이 거의 같은 높이로 불붙자, 도심 곳곳의 조달대가 이를 명령으로 잘못 알고 함께 불을 올렸다. 화재는 다섯 날을 갔다. 재건은 1981년까지 기다렸다. 4년에 걸친 작업이 1984년 12월 1일에 끝나면서 재건된 건축군이 생겼다. 높이 14.6미터의 3층 본 누각이 긴 회랑으로 이어져 10미터의 2층 좌우 날개와 연결되고, 남아 있는 성벽 위에 놓였으며 난간을 따라 석조 경비상 62마리가 늘어서 있다. 옆에는 1946년 전사자를 위해 세운 충렬 비문군이 있다. 화강암 문은 문화 혁명 때 부서졌고 2006년에 다시 세워졌다. 2013년 성벽 자체가 국가 중점 보호 목록에 올랐다. 주변의 공원은 작고 잘 쓰인다. 아침에는 누각마다 오페라 애호자들이 모인다. 그래서 망루는 마침내 도시가 탑에 하는 일, 곧 서서 있기 위해 서 있는 곳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