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예배당보다 먼저 손님을 맞는 장소였다. 1773년 톈진 소금 상인들은 싼차허커우에 3층 152칸 규모의 탑을 세워 황실 행궁으로 삼았다. 건륭제는 하이허를 바라보는 탑이라는 뜻으로 하이허러우라 이름 붙였다. 소금 거래의 돈으로 지었다는 사실은 이 도시에서 소금 산업이 무엇을 뒷받침했는지 보여 준다. 1869년에야 프랑스 선교사 셰푸신이 곁의 충시관을 허물고 톈진 최초의 가톨릭 성당을 세웠다. 황제를 위한 숙소에서 출발한 터가 한 세기도 안 돼 도시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소가 됐다.
저널에서
세 차례 불탄 성당
황실 행궁과 1869년 성당, 1870년 톈진 교안, 1904년 전까지 이어진 두 차례 화재.
같은 도시에서 · 허베이구 ↗성당에 앞서 행궁이 있었다
1870년 6월
성당은 1870년 6월 21일 톈진 교안 때 불탔다. 시 자료는 성당의 고아원이 아이를 납치해 세뇌한다는 의심을 받았고, 현 관리가 건물에서 갈등을 빚으면서 천주교 신자와 주민의 충돌로 번졌다고 설명한다. 성당과 인근 프랑스 영사관이 불탔고 프랑스 수녀 열 명과 영사를 포함해 외국인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와 다른 여섯 나라가 항의하자 청 조정은 은 40만 냥을 배상했다. 성당은 그 배상금으로 1897년 다시 지었다.
두 번 더 이어진 화재
재건한 성당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1900년 의화단 운동 때 다시 불탔다. 강 건너 옛 라오룽터우역도 같은 전투로 파괴됐다. 광서 30년인 1904년 의화단 배상금으로 성당을 세 번째 지었다. 스쯔린제 292호에 선 건물은 이 터의 세 번째 성당이며, 1976년 탕산 지진으로 다시 크게 손상돼 1983년 시 정부가 복원했다. 1988년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 2005년 특별보호 역사풍모 건축물로 지정됐다. 네 차례 파괴를 겪은 건축물의 기록으로는 상당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