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에서

1938년 이창을 비운 선단

루쭈푸는 민생을 70톤 배 한 척에서 46척으로 키우고 사람과 공장을 창장을 따라 충칭으로 옮겼다.

같은 도시에서 · 베이베이구 ↗

한 척에서 마흔여섯 척으로

1925년 루쭈푸는 친구들과 돈을 모아 민생실업회사를 세우고 상하이에 가서 70.6톤 철제 배를 주문했다. 배는 1926년 5월 완성되어 ‘민생’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곧 자링강의 허촨과 충칭 사이에 취항했다. 처음에는 이 한 척뿐이었지만 운항은 제때 이루어졌다. 1937년까지 회사는 46척, 총톤수 1만 톤 남짓, 직원 약 4천 명을 거느린 중국 최대 민족 해운 기업이 되었다. 정부에 불려 관직에 나가기 전 루쭈푸는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내고 철도도 놓았다.그 한 척이 회사의 출발점이었다.회사의 첫 배는 작았지만 운항은 정확했다.

1938년 가을의 이창

1938년 1월 루쭈푸는 교통부 차장이 되었다. 10월 우한이 함락되자 이창에는 사람과 화물이 쌓여 수송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10월 23일 이창에 도착해 위이 항로를 다닐 수 있는 배 24척 가운데 22척이 민생의 배임을 알았다. 선단은 철수의 주력이 되었다. 교통부에는 충칭에서 목선 2000척을, 후베이에는 800척을 모으도록 요청했다. 이후 두 달 동안 3만 명이 넘는 사람과 10만 톤의 화물이 내륙으로 들어갔다. 일본의 폭격으로 회사는 배 16척을 잃고 직원 116명이 사망했다.목선까지 포함한 선단이 이창의 화물을 실어 날랐다.

내륙에 닿은 규모

1940년 6월 이창이 함락되기 전까지 민생회사는 150만 명이 넘는 사람과 100만 톤이 넘는 화물을 쓰촨으로 옮겼고 270만 명이 넘는 쓰촨 군인을 전장으로 내보냈다. 피난자에는 관청, 학교, 공장, 병원의 6만 4천 명, 타오싱즈, 푸단 대학과 우한 대학의 교수와 학생이 포함되었다. 교통부의 추산에 따르면 실어 올린 기계로 매달 수류탄 30만 개, 박격포탄 7만 발, 항공 폭탄 6000발을 생산할 수 있었다. 1945년 10월 루쭈푸는 승리훈장을 받았다. 사람과 기계와 원료가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후방의 공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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