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에서

이주민의 회관

후광과 광둥 상인이 신을 모시고 장사를 하고 이 도시를 쥐고 있던 청대의 회관.

같은 도시에서 · 위중구 ↗

쓰촨을 채운 이주

원의 끝에서 명의 홍무 연간까지, 그리고 청의 순치에서 건륭 연간까지 나라는 두 번에 걸쳐 전란으로 줄어든 인구를 메우기 위해 사람을 쓰촨으로 옮겼다. 백 년 동안 약 600만 명이 왔고 그중 300만 명이 후광, 즉 지금의 후베이와 후난 출신이었다. 그들은 장강 물길로 싼샤를 지나 왔고 후베이와 장시 사람이 많았다. 또는 육로로 구이저우와 후베이의 옛길을 따라 들어왔다. 쓰촨의 인구는 1757년의 268만 명에서 1790년에 888만 명이 되었다. 오늘날 쓰촨 사람의 약 70퍼센트가 그 이주의 후손이다. 족보를 몇 대만 올라가면 후광에 닿는다.

후광 회관
후광 회관

여덟 성의 여덟 회관

회관은 이주가 낳은 제도였다. 같은 고향 사람끼리 모이는 곳으로 떠도는 사람이 묵고 만나고 고향의 신을 모시고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건륭 연간부터 1891년까지 충칭에는 여덟 개의 큰 회관이 있었고 광둥, 저장, 푸젠, 후광, 량장, 장쑤, 산시, 산시가 각각 하나씩 저마다의 뜰을 가졌다. 강희 연간에 후광 이주민을 위해 세운 위왕궁은 다른 회관들이 그 둘레로 모이는 중심이었다. 1759년 건륭제 때 회관이 그 둘레에 지어졌고 1846년에 다시 지어졌다. 여덟 가운데 가장 잘 남은 것이 바로 이곳이다. 뜰과 무대와 비석이 지금도 눈에 들어온다.

둥수이먼 곁의 건물군

회관은 창빈루의 바자오위안 샹 1번지, 양쯔강 둥수이먼 쪽 기슭에 있다. 이 이름은 위왕궁과 후베이 황저우 사람들이 세운 치안 회관, 남화궁이라고도 하는 광둥 회관, 그리고 장시 회관을 아우르며 여러 뜰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중국 도시 중심부에서 알려진 가장 큰 옛 회관 건축군이며 2006년부터 전국 중점 문화재이다. 이주 박물관이 안에 있다. 뜰과 정원, 회의실과 무대는 장사와 제사, 오락과 교류를 위해 지어졌고 지금 읽어도 이 도시가 어떻게 사람으로 채워졌는지의 기록이다. 뜰과 정원, 회의실과 무대가 그 네 가지 쓰임을 나눠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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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및 저작권
  1. 후광 회관ScareCriterion12 / CC BY-SA 4.0 · CC BY-SA 4.0 원본 사진 출처 ↗ 권리 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