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관은 톈진 사람이 아닌 이들이 세웠고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광서 33년인 1907년 정월 열나흗날, 세관감독 탕샤오이와 광둥 상인들이 돈을 모아 공사를 시작했다. 이들은 고루 남쪽의 옛 염운사 관저 터를 사들였다. 완공된 건물은 영남 건축과 북방 사합원 양식을 결합했다. 남쪽 상인이 북쪽 도시에서 지을 때 생기는 조합이다. 배치는 기후에 맞추고 장식은 후원자의 취향을 반영했다. 회관 주변에는 상점과 거주 공간 300여 칸이 들어서 회관은 건물이자 한 구역이 되었다.
저널에서
쑨원이 연설한 무대
광둥 상인들이 1907년 세운 회관. 회전식 조정천장 아래 깊이 10미터인 무대가 있다.
같은 도시에서 · 난카이구 ↗세관에서 마련한 자금
깊이 10미터의 무대
회관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은 극장이다. 무대는 깊이 10미터, 너비 11미터이고 위에는 촘촘한 회전식 두공으로 짠 둥근 조정천장이 있다. 정교한 목재 부재를 맞춰 만든 구조는 하중을 분산하는 동시에 소리를 다듬는다. 닫힌 안뜰에서 많은 관객을 맞이하도록 설계한 무대다. 상인 사무실이 아니라 연극박물관으로 이 건물이 쓰이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보통 회관에서 장부가 남지만, 이곳에는 회관이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방이 남았다.
무대 위의 정치
무대에서는 경극만 공연한 것이 아니다. 1912년 8월 24일 동맹회 북부지부가 쑨원과 황싱을 초청해 이곳에서 연설하게 했다. 1919년에는 덩잉차오가 각성사를 이끌고 모금 공연을 열었다. 1937년 이후 일본 점령기에는 회관이 경찰 훈련학교로 쓰였다. 지금은 톈진 연극박물관으로서 메이란팡·상샤오윈·마롄량의 그림과 무대 의상을 비롯해 연극 관련 유물 4천여 점을 소장한다. 상인들의 연회를 위해 지은 방에는 공화국 건국의 연설과 학생 모금 공연, 점령군의 학교, 경극 유물이 차례로 쌓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