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에서

건릉의 돌과 뒤이어 새겨진 목소리

무자비는 끝내 빈 채로 남지 않았다. 후대의 시와 명문이 조각 행렬과 시종상에 더해져 거듭 재해석되는 경관을 이루었다.

같은 도시에서 · 셴양 ↗

글자를 얻은 기념비

무자비는 신도 동쪽에 서서 고종과 관련된 술성기비와 마주한다. 건릉 안내에 따르면 거대한 한 덩이 돌로 만들어졌으며, 상부에는 휘감긴 용, 측면에는 구름과 상승하는 용 무늬가 새겨졌고 받침 앞면에는 사자와 말 장면이 있다. 이름은 오해를 부를 수 있다. 비는 처음에 명문 없이 세워졌지만 계속 빈 채로 있지는 않았다.

공식 설명은 북송 이후 사람들이 이곳에 시와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1134년에 새겨진 이중 언어 명문 ‘대금황제의 아우’ 기록이다. 여기에는 거란 소자와 한문 번역이 함께 있다. 글은 건릉 방문과 유적 훼손을 수리하라는 명령을 기록한다. 따라서 이 비는 처음 세워진 당대의 순간뿐 아니라 후대 방문자와 정치 세계의 흔적도 간직한다.

전설보다 먼저 새겨진 표면을 보다

빈 면을 둘러싼 이야기에 앞서 비석의 덩치와 장식에 주목할 만하다. 비신은 통돌로 이루어지고 꼭대기에는 서로 얽힌 용이 조각되었다. 측면에는 구름 사이로 오르는 용이, 받침에는 사자와 말이 있다. 주요 명문 면이 비어 보이더라도 이 물체가 정교하게 가공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시각적·물질적 대비만으로 처음 글이 없었던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무측천이 후대에 명성을 남기려고 비워 두었다거나 후대 군주들이 적절한 문구를 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존 비석은 어느 설명도 증명하지 않는다. 신중하게 말할 수 있는 범위는 좁다. 처음에는 명문이 없었고 후대 방문자들이 글을 더했으며, 연대가 확인되는 한 글은 1134년 수리 명령을 기록한다. 동기를 열어 두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후대 역사가 더 또렷하게 보인다.

건릉의 이른바 무자비에 새겨진 후대의 명문.
건릉의 이른바 무자비에 새겨진 후대의 명문.

신도와 시종상

신도에는 한 쌍의 화표, 날개 달린 말, 타조상, 석마와 사람 형상의 시종상이 늘어서 있다. 이들이 량산으로 향하는 길을 조각 행렬로 만든다. 내곽 근처에 서 있는 이른바 ‘61명의 번신·사신상’은 장면을 황실 가족 너머로 확장한다. 정연한 배치는 능묘에 공적·외교적 차원을 더하고 당 궁정의 시각적 질서 안에 방문자와 대표자를 둔다.

건릉 안내는 이 무리도 남아 있는 석조물로 소개한다. 넓은 명칭은 수도 밖 여러 집단과 조정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지만 개별 인물의 신원을 밝히려면 더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먼저 배경 속 한 집단으로 바라보자. 사람들이 참도를 향해 서 있고 동물, 문, 기념비와 같은 경관을 나눈다.

훼손에는 역사가 있지만 원인 하나로 단정할 수 없다

한 명문은 조각 경관에 후대의 구체적인 목소리를 더한다. 건릉 기록에 따르면 1134년 금 왕실의 한 인물이 능묘를 방문해 지상 건축물이 심하게 훼손된 것을 보고 관리들에게 수리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거란 소자와 한문 번역으로 된 이중 언어 글은 무자비에 그 방문을 남겼다. 이 기념비는 후대 궁정이 당 황릉과 만난 증거가 되었다.

수리 기록은 비석과 신도를 하나의 이야기로 잇는다. 방문자는 거대한 석상과 한 쌍의 비석이 표시된 경관을 지나갔고, 수리 명령은 오래된 능묘를 돌보는 일을 자신의 정치 행위로 만들었다. 조각된 동물과 시종상, 후대의 글을 기억의 층위로 함께 읽을 수 있다. 당은 황제의 참도를 조성했고 12세기 방문자는 그것을 보고 수리한 기록을 남겼다.

건릉 석재에 새겨진 명문을 가까이서 본 모습.
건릉 석재에 새겨진 명문을 가까이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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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및 저작권
  1. 건릉의 이른바 무자비에 새겨진 후대의 명문.Gary Todd from Xinzheng, China · CC0 · CC0 원본 사진 출처 ↗ 권리 정보 ↗
  2. 건릉 석재에 새겨진 명문을 가까이서 본 모습.猫猫的日记本 · CC BY-SA 3.0 · CC BY-SA 3.0 원본 사진 출처 ↗ 권리 정보 ↗